역사 12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서울에 청계천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종로구 숭인동에 옛 ‘정업원 터’가 나온다. 본래 정업원(淨業院)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 안에 있던 여승방(女僧房)이었는데, 주로 양반 출신의 여인들, 또는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머물던 절이다. 단종의 아내였던 정순왕후, 송비는 단종이 폐위되고 단종에 이별한 후에 이곳에 초막집을 짓고 세 명의 시녀와 함께 머물렀는데, 명주를 짜서 옷감을 만들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딱히 여긴 세조(수양대군)가 식량을 내렸지만 끝내 받지 않고 세 궁녀가 동냥하는 밥으로 어렵게 연명했으며 조석으로 뒷산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보며 소일했다. 그래서 그 뒷산이 훗날 동망봉(東望峯)이란 이름을 얻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송비가 동냥으로 산다는 소문이 성안에 퍼지자 이를 ..

역사 2024.09.30

12.12사태 버금같던 1907년 고종양위사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사건은 고종 축출 실행의 결정적인 사건이였다.  밀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은 밀사파견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를 방치했다는 주장이 더욱 유력하다.  1907년 7월 18일에 일어난 고종 양위 당시의 기록을 보면 흡사 1980년 12.12사태를 보는 기분이다. 다음은 고종 양위 사태의 일지이다   1907년 7월 3일- 이토 히로부미가 인천에 방문한 일본해군 함대사령관 도미오카 중장을 대동하고 고종을 알현한다. 그러나 밀사사건에 대해서는 일체언급 하지 않는다. - 퇴궁하면서 의전장 고의경에게만 '일본에 적대하려 거던 음험하게 하지말고 당당하게 대하라하게. 얼마든지 적수가 돼 줄테니…'라는 말을 남긴 다. 1907년 7월 4일- 이토 히로부미는 '국정조사촉탁'이..

역사 2024.09.20

고종황제와 미국여성 비밀결혼 사건

1903년 10월 24일 치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라프'지의 1면 헤드라인 기사는 다음과 같다. '필라델피아 출신 미국 아가씨 에밀리 브라운, 한국의 황후가 되다, 1700만 조선 백성을 신민으로 거느리다'. 그로부터 한달 뒤에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는 이 특종 기사를 받아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다시 신문 1면 머리기사를 올리고 결혼식 진행을 상세하게 보도한다. 당시 뉴스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하이오의 독실한 장로교회 목사 피터 브라운이 10년전 열다 섯살난 딸 에밀리를 데리고 한국에 선교차 갔다. 이 선교사가 고종을 알현할 때 에밀리를 데리고 궁궐에 들어갔다. 당시 명성황후가 뜻하지 않게 숨진 뒤에 고독한 나날을 보내왔던 황제께서 이 순..

역사 2024.09.19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사 (8)

1.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일요일 아침이였건만....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5분, 진주만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요일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항내는 새벽의 안개에 쌓여 있다가 점차로 화창한 햇살을 맞이하면서 화창하게 개어가고 있었다. 많은 수병들이 주말 상륙허가를 받아 대부분의 함내는 당직이었던 수병들이 오전 식사를 마친 후 서로 담소를 주고 받으면서 함내를 오가고 있었다. 오전 8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기 시작했고, 일요일 8시의 국기 게양식을 앞두고 정렬해있는 해군 군악대가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바로 그때 갑자기 저공으로 엔진 폭음을 울리며 날아든 몇대의 항공기가 이들의 머리위를 지나 포드섬쪽으로 향했다. 국기게양을 하다가..

역사 2024.09.12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사 (7)

1. 출격 제 1파 공격대가 모두 이륙하자마자 다시 모든 항공모함의 정비사들과 무장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시마사키 소령이 이끌게 될 제 2파 공격 부대의 총 170기의 함재기들이 한시간 후에 이륙할 예정이었으므로 전 항공모함 내에 모든 승조원들이 긴박하게 다음 공격 준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다시 항공모함의 갑판은 함상 폭격기들과 전투기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제 1기동부대로부터 공격기부대 재 1파가 발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야마모토 제독은 아무말 없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리고 부관에게 미국의 일본대사가 선전포고문을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기 30분 전에 전달하기로 된 계획이 차질없이 추진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참모는 이미 암호문을 미국의 일본대사관으로 보냈으며 일본 대사는 하와이 시간으로 오전..

역사 2024.09.11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전쟁사 (6)

1. 암호명 Z작전: 완벽한 작전 계획이 필요하다. 1941년 1월, 야마모토 제독은 비밀리에 일본제국 해군 내 최고 엘리트 장교들을 불러모아 비밀그룹을 만든 뒤 진주만 기습에 대한 작전을 수립하도록 했다. 이 그룹은 해군 항공전문가인 오니시 제독이 이끌고 있었으며 야마모토의 참모장인 구사까 류노스께 소장과 영국 무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던 겐다 미노루 소령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특히 젊은 소령 겐다 미노루는 전술의 귀재로 소문이 나있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영국함대의 타란토항 공습작전을 면밀히 분석하여 공격 계획의 영감을 얻었다. 겐다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박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하는 40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다. 각 폭격기 조종사들은 최우선..

역사 2024.09.10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5)

1. 일본해군 태평양을 넘보다. 1941년을 당시 일본 해군은 미국의 생각과는 달리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충분히 미해군과 일전을 벌일 만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해군은 일본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감히 일본이 미국에게 도전해 오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므로 태평양보다는 유럽전장과 인접한 대서양쪽을 더 중요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미해군의 항공모함은 대서양쪽에 더 많이 진출해 있었다. 더구나 이때까지 미국은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주만으로 함대를 전진 배치 시켰을 뿐, 전쟁에 빠져들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 대해서는 소흘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중일전쟁의 경험으로 많은 새로운 함선과 항공기를 생산했고, 승무원들의 실력도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 2024.09.09

제 2차 세계 대전 : 태평양전쟁사 (4)

1. 승부수를 던지는 일본제국 1941년 8월 일본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육군대장 '도죠 히데끼'를 필두로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세계지도를 펴놓고 은밀하게 야심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독일이 승승장구 하면서 전 유럽을 흔들어 놓자 일본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동남아 지역은 100여년 동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등 서국 각국이 식민지화한 후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독일에게 패하여 본국이 점령당함에 따라 식민지 관리를 위한 군사적인 능력을 상실했으며,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태로 독일의 침공에 맞서서 본토 방위에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식민지 관리에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나라로 성장한 일본은 아..

역사 2024.09.05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사(3)

1. 해상전투의 새로운 전환점, 항공모함의 출현 한편, 일본 해군은 육군 항공대와는 별도의 항공세력을 확장하면서 중일전쟁에서 활약했다. 1차대전이 끝나자 일본해군은 영국해군, 미국해군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강력한 해군을 목표로 함선의 건조를 시작했고, 해군력의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게다가 섬나라라는 특성상 강력한 해군은 일본의 식민지 유지와 외부로 향한 침략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일본은 필사적으로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사실,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서 산업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일본이었음에도 해군력의 강화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아 수많은 전함을 건조했으며,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러일전쟁 당시 대한해협에서 벌어졌던 동해해전에..

역사 2024.09.02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전쟁사 (2)

1.중경대공습 1937년부터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으로 침공해 들어오면서 일본 육군항공대의 폭격기들과 전투기들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지상의 중국군을 유린했으나 중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북경, 상하이, 남경등의 도시가 속속 떨어져 일본군의 군화에 짖밟혔지만 도무지 일본군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복엽기의 에이스 진서전과 같은 소수의 영웅적인 조종사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사실상 중국 공군이라는 존재는 서류상에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초빙을 받아 중국 공군의 군사고문으로 취임했던 '클레어 센놀트'는 중국 공군의 한심한 상황에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에 국가 존망의 위기앞에서 중국군의 군율이 너무나 엉터리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센놀트가 현 상황..

역사 2024.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