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부수를 던지는 일본제국
1941년 8월 일본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육군대장 '도죠 히데끼'를 필두로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세계지도를 펴놓고 은밀하게 야심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독일이 승승장구 하면서 전 유럽을 흔들어 놓자 일본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동남아 지역은 100여년 동안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등 서국 각국이 식민지화한 후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독일에게 패하여 본국이 점령당함에 따라 식민지 관리를 위한 군사적인 능력을 상실했으며,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태로 독일의 침공에 맞서서 본토 방위에 신경을 써야 했으므로 식민지 관리에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나라로 성장한 일본은 아시아의 자원지대는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인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때 맞추어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자, 이 동남아의 자원 지역이야말로 일본에게는 임자가 없이 방치된 먹음직스런 고기덩어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으며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서 일본이 나서 서구 열강을 몰아내고, 아시아의 자원을 공유하는 아시아인들이 번영해야한다는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은 1937년에 시작되어 초전에는 승승장구 했으나 4년째 광대한 중국대륙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에서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서 광대한 식민지 유지와 전쟁을 수행할 자원이 점차로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이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석유가 큰 문제였다. 대부분의 석유는 미국을 통해서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 석유를 구할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 한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것이다. 1941년 8월을 기점으로 일본이 비축하고 있는 석유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8개월 분량이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수치였다. 석유야말로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일본군은 점점 더 많이 석유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매일 규모가 커지는 일본 해군만해도 군함들과 함재기가 소모하는 석유소모량이 하루에 400톤을 넘고 있었다.
한편, 유럽과 중국등의 어떠한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1940년 7월 기존의 해군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야심적인 새로운 해군의 건설을 발표했다. 이 계획의 골자는 1940년 현재 일본의 전투함에 비해서 7 : 10으로 근소한 차이로 우세한 미국의 해군전력을 1943년까지는 5 : 10, 1944년까지는 3 : 10으로 벌려 놓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7 : 10으로 우위라고 해도 미해군은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나누어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엄밀하게 태평양만 놓고 본다면 일본이 전투함의 수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능력으로 볼 때 이 계획은 예정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조만간 일본해군을 수적으로 완전히 압도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미국은 1939년 루즈벨트의 은밀한 명령으로 1940년 5월 이전에 일본에 대한 견제와 세과시를 위해서 전통적인 미해군기지였던 샌디에고에 주둔하고 있던 미 태평양 함대를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이동 배치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로서 미 태평양 함대는 바로 일본의 목전까지 위협할 수 있는 거리에 와있게 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미의회에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부당성과 만행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로비를 벌이자, 중국에 대해서 호의적인 미의회의 여론은 점차로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석유를 비롯한 필수물자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일본의 정부의 군국주의자들은 난감해졌다. 그들은 이제 와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니 많은 인명 손실과 전쟁 물자를 퍼부으며 진행중인 중국전선에서 물러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자니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석유도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였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려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앞으로도 미국은 사사건건 일본의 앞길을 막으려 할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일본의 우려는 1941년 7월 일본이 제 25군을 이동시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지역을 점령하자 미국이 즉시 철수를 요구하면서 석유의 금수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분명해졌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이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미국의 압력에 치욕적으로 굴복하느니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자면 천연자원이 풍부한 동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한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유전지대를 점령하여 석유를 포함한 자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계획에는 하와이로 전진 배치된 미태평양 함대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사실상 필리핀에 주둔 중인 미군의 병력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일본군에 비해 보잘 것 없었으므로, 하와이의 미해군만 없다면 일본의 앞길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허수아비같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군대는 무시해도 좋은 수준이었고, 영국군도 별 위협이 될 수는 없을 것인데, 눈엣가시같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는 위치로 전진하여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미태평양 함대의 하와이 전진 배치는 마치 '목에 들이댄 칼'과도 같은 큰 위협이었다.
한편 미국은 일본에게 계속 침략전쟁을 중지할 것에 대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철병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와 맺은 3국 동맹을 파기하지 않는 한 경제봉쇄는 계속될 것이라고 미국의 헐 외무장관은 큰소리 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외무대신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중국에대한 미국의 비공식적인 무기지원을 중단하고 석유수출을 재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양측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계속 변함이 없었다. 미국이 중국에서의 일본을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일본의 외교부는 다음과 같은 대응 성명으로 맞섰고, 서로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양국의 태도는 서로간의 감정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까지 악화시켰다. "이제 일본은 막 외부로 뻗어나가려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발전단계의 나라가 그 이웃나라를 괴롭히지 않은 예가 있었는가? 미국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라!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멕시코인들에게 물어보라! 미국인들이 얼마나 잔혹한 방법으로 그들을 다루었는가를..."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의 작은나라 일본에 대해서 전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심리적으로 일본을 얕보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일본을 이러한 위협만으로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계속 일본에게 치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외교적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이고 단호한 태도는 점차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궁지로 몰고 있었고, 일본에게 더 이상 미국과 교섭가망은 없어보였다. 군국주의자들에게는 이제는 치고나가느냐, 아니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느냐 하는 선택만이 남아있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몰리자 일본 수뇌부는 자신들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서 단하나의 방해세력인 미 태평양 함대에게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서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일본에게 상황이 점점 불리해질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다급하게 내린 결론이었다.
1939년 8월 일본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의 자리에 올라 일본해군의 수장이 된 '야마모토 이소로구' 제독은 장교시절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경험이 있어 미국 산업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계속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미국과 전쟁을 하게되면 일본에게 파멸적인 결과가 올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고 일본해군을 대표해서 계속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자 일본의 열성 군국주의자들이 야마모토를 공적으로 치부하고 암살을 기도했다. 사실 이 시기의 일본은 군국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암살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그의 성품을 잘 이해하고 있던 해군대신은 야마모토를 암살자들의 손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내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야마모토를 비롯한 해군 지휘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를 쥐고 흔들던 수상겸 육군대장 도죠 히데끼는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으며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 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야마모토는 이렇게 된 바에는 일본해군이 전면에 나서서 미 태평양 함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빠른시일 내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미국과 강화를 체결하는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진주만에 집결해 있는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격멸하게 위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새로운 전쟁은 육군보다는 일본 해군이 주역을 맡아서 수행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 미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에서 신속하게 격멸시킨다면 미국은 함대를 2배나 먼거리의 미국 본토로 철수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고. 함대 규모에 있어서 일본의 연합함대가 훨씬 우세한 상황이 되므로 태평양의 제해권은 쉽게 일본에게 넘어올 것이었다. 미국의 산업이 군수체제로 가동되어 군수물자를 쏟아내기전에 승기를 잡아댜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유리한 조건을 내세워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야마모토에게는 신속하고 확실한 승리가 꼭 필요했다. 야마모토는 일왕 히로히토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히로히토가 일본해군의 능력으로 미해군을 제압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처음 1년간은 분명히 두드러진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1년을 넘긴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산업능력을 잘알고 있던 야마모토는 전쟁이 시작된지 1년후면 미국은 엄청난 산업능력으로 군수물자를 쏟아낼 것이고 이렇게 되면 상황이 매우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야마모토의 우려에 대해서 일본 수뇌부는 1년이면 유럽의 독일군이 소련군을 충분히 제압할 것이고 미국은 유럽 전선에 신경을 써야할 처지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태평양의 전쟁은 포기하고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인정하는 강화조건에 응해야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결국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1941년 가을 일본 수뇌부에서는 수많은 작전회의가 열렸다. 대부분의 육군 장성들은 동남아시아의 유전지대를 손에 넣으려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병력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 있었지만, 회의가 열릴 때마다 야마모토는 남방작전을 시행하기전에 진주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태평양 함대를 그냥 놔두고 남방작전을 감행하는 것은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위험한 것이라는 것이 야마모토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해군장성들은 대부분 이 계획에 반대했다. 일본해군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장성들은 해전의 승리는 전통적인 전함의 거포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해군의 항공력으로 선제공격을 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작전이었다. 게다가 무슨 수로 적에게 들키지않고 6척의 항공모함과 20여척의 호위함대를 이끌고 그 먼 태평양 한가운데까지 가지고 간다는 말인가? 만일 작전이 발각되면 일본해군은 미해군의 홈그라운드에서 불리한 해전에 빠져들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해전에도 항공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야마모토는 다른 해군장성들이 주장하는 고전적인 전함의 거포에 의한 해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실, 그런식의 포격전을 위주로한 해전은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며, 이미 미국도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는이상 일본의 전함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일본의 항모가 기습 공격의 주력이며 진주만 공격은 일본의 모든 작전중에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한다고 역설했고, 결국 전함파 제독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접여야 했다. 결국, 그의 자신있는 주장에 수긍한 일본 수뇌부는 진주만 공격을 허가한다. 그리하여 일본해군이 전력을 기울여 공격할 최우선적인 공격목표는 진주만으로 정해졌다. 물론 해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는 것과 동시에 남방작전도 개시되어 일본 해군과 육군도 동남아시아 방면의 미군과 영국군에게 즉각적인 기습 공격에 착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진주만 공격작전'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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