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암호명 Z작전: 완벽한 작전 계획이 필요하다.
1941년 1월, 야마모토 제독은 비밀리에 일본제국 해군 내 최고 엘리트 장교들을 불러모아 비밀그룹을 만든 뒤 진주만 기습에 대한 작전을 수립하도록 했다.
이 그룹은 해군 항공전문가인 오니시 제독이 이끌고 있었으며 야마모토의 참모장인 구사까 류노스께 소장과 영국 무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던 겐다 미노루 소령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특히 젊은 소령 겐다 미노루는 전술의 귀재로 소문이 나있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영국함대의 타란토항 공습작전을 면밀히 분석하여 공격 계획의 영감을 얻었다.
겐다의 보고서에 의하면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박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하는 40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다. 각 폭격기 조종사들은 최우선 목표인 미해군의 항공모함과 전함에 정확하게 철갑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도록 숙련되어야 했으며, 뇌격기 조종사들은 정확하게 전함의 중심부 홀수선을 강타할 수 있도록 어뢰를 저공으로 정확하게 투하할 수 있는 고도의 기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예상되는 미군 전투기들의 반격에 맞서 공격기 부대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최신 제로전투기가 100대이상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1941년 여름부터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을 대상으로하는 구체적인 공격 훈련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여름햇살이 내려쬐는 가운데 일본 해군의 함재기 조종사들은 가고시마만의 얕은 바다쪽으로 훈련비행을 시행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매일 새벽부터 이 지역에는 함재기들의 저공비행 훈련이 계속되었다. 연일 시끄러운 폭음이 끊이지 않았고 각 항공기의 조종사들은 후에 자신들이 훈련받는 이곳 가고시마만이 진주만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연일 뇌격과 폭격연습이 계속되고 항공기들이 일으키는 요란한 소음 때문에 가고시마만 일대의 고기들이 자취를 감추어 어민들은 고기를 잡을 수 없었고, 집에서 기르는 닭이 스트레스를 받아 알을 낳지 못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해군 조종사들은 부대로 돌아오면 밤마다 모여서 2X2m 로 제작된 진주만의 지형모형을 보면서 눈에 익숙해 지도록 했으며, 미군 전함들의 사진을 보면서 식별 연습을 했고, 결국은 멀리서 실루엣만 보고도 미국 전함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 숙달되었다. 각 조종사들에게는 하와이의 일본군 첩보원이 보내온 진주만의 풍경이 나타난 그림엽서가 한 장씩 지급되어 항상 공격목표를 상기하도록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보원들의 보고를 토대로 구체적인 공격목표가 설정되기 시작했다. 우선 호놀룰루시에서 동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한 진주만에 정박하는 전함과 항공모함등의 주요 전투함들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그리고 또하나의 주요 목표는 진주만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포드섬이었는데 여기에는 해군 항공대의 중앙정비시설로 사용되는 거대한 해군항공기지가 있었다. 그리고 진주만을 중심으로 위치한 육해군의 항공기지들도 주요 목표로 선정되었다. 항만의 입구 서쪽에 위치한 이와 해병항공기지, 동쪽의 버로 기지, 중앙의 휠러 기지와 그옆에 위치한 힉캄 기지가 주요 항공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외에 북쪽에 멀리 떨어진 할레이와 기지, 섬 동쪽에 위치한 카타오헤 해군항공대 기지도 가능하면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 훈련과정에서 작전을 수행하는데 큰 문제점이 드러났는데 그것은 어뢰 때문이었다. 몇 개월동안 훈련을 했지만 800kg에 달하는 어뢰들이 너무 높거나 낮은 고도에서 투하되어 물에 떨어진후 바닥에 충돌하면서 쳐밖히거나 충격으로 고장을 일으켜 작동을 멈추거나 튀어오르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주행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사실상 그동안의 어뢰는 투하되어 물에 착수하면 30m이상을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면서 주행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진주만의 수심은 대개 15m 정도로 매우 얕아서 어뢰 공격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겐다 소령은 야마모토에게 어뢰 공격을 포기하고 폭탄만으로 공습을 시행하는 것을 건의했지만 야마모토는 어뢰가 없이는 전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어뢰공격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이 난점을 개선하기위한 연구가 진행된 끝에 어뢰에 나무로 제작된 안정장치를 부착하고 고도 30m 정도에서 투하하면 진주만의 얕은 수심에서도 주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하여 안정장치를 부착한 신형어뢰를 급히 제작하도록 긴급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편 하와이의 일본총영사관에서는 수 개월동안 매주 미태평양 함대의 동정을 분석하여 보고했다. 몇 달간의 분석이 끝나자 미국 함대가 거의 예외없이 매주 토요일마다 항내로 입항하여 정박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하여 공격일자는 가장 방어가 허술할 것으로 생각되는 하와이 날짜로 일요일 새벽에 감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진주만을 공격하려던 일본해군은 암호명 'Z' 작전으로 명명된 진주만 기습을 애초에 1941년 11월 17일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형어뢰의 제작이 늦어져 어쩔 수 없이 20일뒤인 12월 7일 (일본시간으로는 12월 8일)이 최종 작전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간신히 어뢰 100발이 함대의 출발 시일에 맞추어 인도되었다. 이 어뢰들이 모두 무사히 작동할 것인지가 매우 불안한 것이었으나 더 이상 작전 연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야마모토는 연합함대의 최정예부대인 제 1 항공함대를 주축으로한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Z 작전을 시작했다.
철저한 무선침묵속에 11월 22일까지 일본해군의 최정예 항공모함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에 더불어 건조된지 얼마 안된 신형항모 즈이가쿠, 쇼가쿠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전함 기리시마, 히에이 그리고 중순양함 도네, 지쿠마, 아부가마등의 주력 함선 31척이 북쪽의 일본령 쿠릴열도의 히도카프만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주요 해군기지가 대부분 미국 첩보원들에게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북방의 조그만 항구를 발진기지로 사용한 것이다.
기동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찌 제독으로부터 모든 승조원들에게는 무선연락을 일체 금지하며 섬광신호만을 사용하라는 엄중한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11월 26일 새벽이 되자 어둠속에서 모든 함선의 닻이 일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동부대의 기함인 항공모함 아카기를 선두로 모든 함선들이 한 대씩 은밀하게 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승조원들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진주만을 공격하러 간다는 소문이 함내에 떠돌고 있었고, 모두들 흥분 되고 들뜬 마음으로 모여서 수근거렸다.
일본 기동함대는 민간 상선들이 많이 다니는 일본과 하와이간의 직항로를 피해서 북쪽으로 우회하는 먼거리를 선택했다. 이 항로는 미드웨이와 알류션열도의 더치하버 사이를 통과하는 경로로서 바다가 험하고 추워서 대부분의 민간선박이 다니지 않는 곳이었으며 미군 초계기의 활동범위 바깥쪽이었다.
그리고 12월 2일이 되자 연합함대 사령부로부터 '니다카 산에 오르라!'는 암호전문이 날아왔다. 이것은 그동안 진행되고 있었던 미국과의 협상이 별 소득이 없으니 예정대로 진주만을 공격하라는 최종명령이었다. 곧 함대의 후미에 따라오던 유조선으로부터 각 함정에 최종 연료보급이 실시되었다. 연료보급이 끝나자 유조선은 일본쪽으로 뱃머리를 돌렸고, 함대는 전속력으로 하와이를 향해서 항진하기 시작했다. 곧 기동부대의 사령관 나구모 주이찌 제독이 전 승조원에게 훈시를 내렸다.
"제군들, 우리의 공격목표는 진주만이다. 이 일전이야말로 우리 황국의 흥폐가 달린 것이다.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작전 당일날 오전에는 36년전 토고제독이 러시아함대를 격파할 때 올렸던 Z기를 올릴 것이다. 모두들 천황폐하를 위해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바란다. 이상이다."
나구모 제독의 훈시가 끝나자마자 공격목표가 진주만이라는 것을 알게된 전 승조원들은 환호성을 울리면서 반자이를 연호했다. 특히 이 순간은 진주만 공습의 일본 항공대를 총지휘할 항공대 지휘관으로 내정되어 있던 후지다 미쭈오 중령에게는 감격에 겨운 순간이었다.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어 의지를 다졌다.
"나는 군인으로서 내 임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틀림없다."
2. 작전 개시
거친 겨울바다를 고속으로 항진하면서 일본을 떠난 지 12일째가 되는 하와이 시간으로 1940년 12월 7일 새벽 5시, 기동부대는 예정된 시각에 드디어 하와이로부터 북쪽 370km의 해상에 도달했다. 새벽의 여명과 쌀쌀한 날씨속에 항공모함의 비행갑판과 격납고에서는 정비사들이 항공기를 최종 점검하고 무장사들이 폭탄, 어뢰, 기총탄을 장착하면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순양함에 탑재된 정찰용 수상기가 먼저 이륙하여 주변에 미해군 함선의 위협은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이어서 무장과 연료보급을 끝낸 함재기들이 갑판으로 올려져 발진 대기상태로 도열한후 엔진 시동을 걸기 시작하면서 갑판위에는 요란한 프로펠러 회전음이 울려퍼졌다.
선봉에 서게 될 항공대장 후지다는 비행갑판에서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후에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 그날 새벽 바다는 약간 거칠기는 했으나 내게는 비교적 잔잔하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안개가 옅게 끼어 있어서 우리 함대를 숨기고 공격기들을 발진시키는데는 정말 이상적인 날씨였다. 웬지 그날 나는 우리의 작전이 성공할 것 이라는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구모 제독은 하와이에 정박중인 미함대에 대한 최신 정보를 수령했다. 이 정보의 내용은 8척의 모든 전함은 정박지에 있었지만, 또 하나의 주요 목표인 미항공모함들이 자리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4척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미 태평양 함대의 항모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항공모함을 공격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였지만 나구모가 정말로 궁금해 한 것은 혹시나 항공모함들이 근처에 있다가 자신의 기동부대에게 역습을 가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신중하기로 소문난 나구모는 마음 한구석에 이점에 대한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사실 나구모는 진주만 기습이 너무 위험하다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가 그렇다면 함대 사령관에서 물러나라면서 윽박지르자 할 수 없이 작전을 맡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때 일본해군이 태평양 함대 소속으로 믿고 있던 미해군의 항모중에서 요크타운은 대서양에서 작전중이었고, 사라토가는 샌디에고 해군기지에서 수리 중이었다. 그리고 렉싱턴은 미드웨이섬의 미해병대에게 항공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금요일에 진주만을 떠나 항진중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섬에 주둔 중인 미해병대에게 항공기를 공급한 후 다시 진주만으로 회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엔터프라이즈는 일본 함대보다 약간 늦게 진주만으로 향하고 있었고 토요일에는 진주만 서쪽 약 370km 지점에 다다르면서 함재기들의 일부를 먼저 진주만으로 보냈고 공습 당일에는 진주만 서쪽 근해로 접근하고 있었다. 결국 이 두 척의 항모는 일요일까지는 진주만에 입항하지 못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미 항모를 찾을 때까지 작전을 연기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새벽 6시 정각에 나구모는 즉시 모든 공격기들을 발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기함 아카기에 Z기가 올라갔다. 그러자 엔진에 시동을 걸어놓은 채로 기다리던 함재기의 고정발판이 치워졌다. 선도기의 후지다 소령은 갑판에 늘어서서 목이 터져라 반자이를 연호하는 승조원들에게 경례를 한후 엔진출력을 최대로 열었다. 그리고 아침해가 막 떠오르려는 붉은 태평양의 바다를 향해서 후지다가 탑승한 97식 함상폭격기가 폭음을 울리면서 날아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항공모함 6척에서 총 183대의 항공기들이 차례로 이함하기 시작했다. 차례로 날아오른 함재기들은 편대를 구성하기 시작했고 총 183대의 공격기부대 1파가 모두 이륙한 후 구름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자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쪽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이 작전의 성패는 우리 조종사들에게 달렸다."
(본 글은 순수 창작글이 아니며 출처를 알 수 없는 관련글들을 인터넷에서 취합, 발췌,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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