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사건은 고종 축출 실행의 결정적인 사건이였다.
밀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은 밀사파견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이를 방치했다는 주장이 더욱 유력하다.
1907년 7월 18일에 일어난 고종 양위 당시의 기록을 보면 흡사 1980년 12.12사태를 보는 기분이다. 다음은 고종 양위 사태의 일지이다
1907년 7월 3일
- 이토 히로부미가 인천에 방문한 일본해군 함대사령관 도미오카 중장을 대동하고 고종을 알현한다. 그러나 밀사사건에 대해서는 일체언급 하지 않는다.
- 퇴궁하면서 의전장 고의경에게만 '일본에 적대하려 거던 음험하게 하지말고 당당하게 대하라하게. 얼마든지 적수가 돼 줄테니…'라는 말을 남긴 다.
1907년 7월 4일
- 이토 히로부미는 '국정조사촉탁'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던 일본의 유명한 정치깡패 우치다를 불러, 황제 퇴위 작전의 구상을 처음으로 지시한다.
- 강조한 것은 고종 양위는 일본의 외압에 의해서가 아닌 조선 조정이 자체적으로 앞장서서 단행한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는 것
1907년 7월 5일
- 각부대신의 어전회의가 열리고, 밀사사건이 안건으로 상정된다.
- 고종은 밀사사건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
-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벌떡일어나 고종을 몰아 세운다. (정사는 송병준을 발언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서에
서 이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송병준은 '폐하께서 우방과의 우호를 깨트리는데 쓰인 재물은 협약(을사조약)전후를 통해
실로 1억에 이르고 있나이다. 이 돈은 폐하 스스로의 산업에 의해 영리한것이 아니오라 인민의 혈육이옵니다. 고로 궁부
는 원부가 되고 있나이다. 일로전쟁후 폐하께서 일본의 신의를 저버린 지가 열네번에 이르오며 다만 인자하신 이토 통감
께서 언젠가는 회개하실 것으로 참고 계십니다. 이 와중에 밀사파견으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판국에 빠져 들고 말았습
니다. 지금 통감께서 찾아와 열다섯 죄과를 어전에서 따진다면 여전히 폐하는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 모면할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하시옵니까??' 그리고 고종이 일본 천황을 찾아가 진의를 오해하고 신의 를 버린데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언행과 표현이 너무나 과격했기로 이 발언의 기록을 하지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 일본군 주둔사령관 하세가와 대장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 밀사사건을 빌미로 병권-재정-사법-경찰권을 박탈을 요구하려
했는데 조선 측에서 양위라는 절충 방안을 제안해 왔다고 했다. (물론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1907년 7월 15일
- 어전회의에서 송병준은 '일본 외상이 견책조건을 들고 한국에 오고있는 중인데 합방을 요구하거나 전권위임을 요구할 것
이 뻔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선수를 쳐야 합니다. 그 선수란 황제께서 황태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므로서 사죄의 뜻을
표하는 일입니다' 라고 했다.
-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에 동조하고, 여타 각료들이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자 '모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하고 이완용이
양위안을 들고 고종에게 올라간다.
-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이런 역적같은 놈!' 이라고 이완용에게 일갈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1907년 7월 17일
- 내각 전원이 고종을 배알하고 '풍전등화인 사직을 소중히 여기시옵소서'하고 양위 허락을 재차 청했지만 고종은 '짐은 죽
어도 양위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 늦은 밤 내각 대신들이 모인다. 내일 거사를 실행키로 한 것이다.
- 내일 회의에는 양위조칙을 미리 써 들고 간다.
- 폐하가 계속 양위를 거부하면 강제로 손을 끌어서라도 양위조칙에 옥새(도장)를 찍게 한다.
- 옥새의 소재 확인과 입수는 법부대신 조중응이 맡는다.
- 조중응은 중대한 국사를 엿들으면 안된다는 명분으로 주변을 모두 물리고, 옥새를 찾아 어전회의에 나오도록 한다.
- 옥새의 입수 성공여부를 암호로 알리기로 한다. 입수했으면 '어전에 아무도 없습니다' , 입수못했으면 '어전에는 한사람
도 없읍니다'라고 하기로 한다.
- 내시나 상궁이 시위대(고종 경호대)에 전화를 할 지 모르니 궁으로 통한 전화선을 미리 모두 잘라놓을 것.
- 여느 어전회의처럼 송병준과 이완용만 말고 모든 각료가 한마디씩 돌아가며 발언할 것.
-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심동체로 행동할 것을 약속한다.
- 내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군부대신 이병무는 이완용의 지시를 받아 무장병력 약 70명을 궁궐안에 진입시킨다.
- 궁문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시위대 1연대 3대대장 임재덕 정위(대위)가 어명없이 궐문을 열수 없다고 문은 열지 않는다.
- 이완용의 심복이자 경호원인 이용한이 칼을 빼어 임정위의 목에 대고 '어디 정위 따위가 군부대신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윽박지르며 문을 개문하고 병력을 진입시킨다.
1907년 7월 19일 당일 오후 4시
- 고종이 불러 이토 히로부미가 입궁한다.
- 고종은 양위에 대한 이토의 진의를 묻지만, 이토는 자신에게 하문할 문제가 아니라는 초연한 태도를 유지한다.
1907년 7월 19일 당일 오후 5시
- 어전회의가 열린다. 송병준은 품안에 권총까지 차고 참석한다.
- 법무대신 조중웅이 '어전에 아무도 없습니다' 를 외친다. 옥새 확보에 성공한 것이다.
- 그런데 가까운 인근에 시위대(경호대)들이 서성거리자 군부대신인 이병무가 중대한 국사의 기밀보장을 명분으로 시위대
들은 멀리 물리친다.
- 계획했던 대로 각료들이 줄줄이 양위의 타당성을 여쭙자 고종은 '경들이 짐을 괴롭히길 이토록 혹심하게 할수 있단말인
가. 짐을 죽이려는 셈인가'고 소리쳤다.
- 고종은 그나마 자신의 편이 되어줄 박영효를 불러오라며 세번이나 지시한다. 박영효는 몇안되는 일본에 포섭안된 인물이
고, 조칙 발표는 궁내대신 박영효의 권한이다. 박영효는 의도적으로 양위 요구 어전회의에 계속해서 궐석하고 있었다.
- 대신들은 오지않는 박영효를 임금의 말을 거역한 역적으로 매도하고 각본대로 총리대신 이완용으로 하여금 박영효를 즉
시 해임하고 즉석 궁내대신을 겸임토록 했다.
고종이 결국 양위에 동의했는 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양위를 공식 선포하지 않은 사실을 보면 일련의 절차적 하자성이 보완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칙작성, 옥새입수 등에 절차적 하자를 고종의 추인으로 모두 적법화 할 수 있었기에 공식 반포를 안한 것은 결국 고종의 동의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907년 7월 20일
2백여 무장병력의 호위 하에 진행된 중화전에서의 양위식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한다. 두 내시를 신구황제로 대행시켜 두 황제없이 양위식을 진행한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업원구기 (淨業院舊基) (1) | 2024.09.30 |
---|---|
고종황제와 미국여성 비밀결혼 사건 (0) | 2024.09.19 |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사 (8) (1) | 2024.09.12 |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 전쟁사 (7) (5) | 2024.09.11 |
제 2차 세계대전 : 태평양전쟁사 (6) (0) | 2024.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