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캐나다 선교의사 올리버 R 에이비슨(한국이름 어비신)
하루는 여느 마을에서 격리되어 사는 한 누추한 천민의 집에 왕진을 갔었다.
천민은 이름도 지을 수 없었기에 그저 '박씨'라고만 불리운 이 환자는 갓이나 망건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백정이었다.
에비슨이 이 백정을 왕진했다는 소문이 번지자, 그의 병원에는 손님이 끊어지고 진료를 기다렸던 환자마저도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병원을 떠났다.
차라리 병을 앓는 것이 낫지 백정 만진 더러운 손을 내 몸에 대게 할 수는 없다는 것. 박씨는 에이비슨의 권유로 무어 목사의 교회에 다니게 됐는데 이번엔 교회가 '백정교회'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져 양반 신도들이 교회를 버렸고, 교회에 나오더라도 박씨 주변은 텅빈자리가 되어 홀로 예배를 올렸다.
박씨에게는 「서양」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신분도 없고, 인권 차별도 없다는 서양을 선망해서 지은 이름이다. 서양이가 자라자 박씨는 에이비슨 씨에게 은혜를 갚고자 병원에서 일을 시켜달라 청하였고 서양이는 에이비슨의 병원에서 바닥청소, 침대정리 등의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병원에 의사 양성 코스가 생기자 에이비슨은 서양이를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정규 의사코스를 참여시킨다.
1908년 6월 한국에서 첫 의과대학 졸업식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 통감 참석 아래 열린다.
당시 졸업생 수는 단 7명.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 박서양도 끼여 있었다.
의대생 아들 박서양 뿐만이 아니라 박씨에게는 딸도 있었는데 이화학당에 다녔으며 딸의 졸업식이 열린 정동교회에 에이비슨 박사는 초대를 받는다. 1,200여명의 졸업생 대표가 단상에 올라 졸업답사를 하는데 에이비슨 박사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박씨의 딸이였긴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의대 교육은 단순히 교육 그 자체가 아니였다.
이 나라의 진정한 근대화의 상징이였고, 신분철폐의 상징이였으며, 인간승리의 상징이였다.
에이비슨 박사의 도움으로 의사가 된 백정의 아들 박서양의 성공은 아시아의 자그마한 여전히 미개했던 어느 나라의 인권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요 눈물겨운 인간승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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