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제국, 아시아의 맹주로 발돋움하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아니 사실상 유일하게 서구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상대를 대파하고 승리자가된 후 조선을 병합하고 만들었고 계속 군사력을 강화하여 아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구제국들에게 온갖 이권을 빼앗긴 청조가 망하고 제대로된 정부가 없는 혼란기에 접어든 중국은 여전히 구심점이 없이 혼란스런 상태였으며 제대로된 정부도 없었고 군사적인 면에서는 원시적인 상태였다. 중국의 광대한 국토는 대륙진출을 노리는 일본에게는 먹음직스런 바비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유럽 제국의 관심은 점차로 줄어들고 화려했던 유럽인들의 동아시아 식민시대는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이제는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제국주의 일본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기위한 침략계획을 점점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우선 식민지가 된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웠고 그 첫단계로는 만주를 집어삼키기로 했다. 사실 만주에는 이미 러 ·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획득한 여러 가지 특수권익이 있었으나, 이것은 중국을 완전히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러시아와 일본만의 협정이었다. 마치 만주를 임자없는 땅정도로 취급했고 러시아를 이겼으니 이제는 일본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점차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이 거세게 일어 항일운동이 계속되었고, 제정 러시아가 붕괴된후에 소련의 스탈린이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1928년부터 추진한 제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이 일본을 자극했다.
일본은 만주지역에 관동군이라는 10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육군부대를 파견해놓고 있었는데 일본은 관동군의 규모를 더욱 확대하여 점차로 전 만주지역을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관동군의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만주 전역을 점거하기위한 야심찬 계획을 수립한 후 일본정부에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곧 구체적으로 만주침략을 결정하고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奉天) 외곽의 류탸오거우에서 일본 병사들에게 중국인 복장을 시키고 스스로 일본회사가 만들었던 만철(滿鐵) 선로의 일부를 폭파했다. 그리고는 곧장 중국인들의 소행이라고 트집잡아 즉시 일방적으로 북만주를 향해서 침략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실상 제대로 무장을 갖춘 조직적인 군대가 없었던 중국군을 쉽게 연파한 일본군은 순조롭게 계획을 달성해 나갔다.
1932년 초까지 거의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포섭하여 허수아비로 만들어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결국 중국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만주를 빼았긴 셈이 되었다.
일본은 만주를 추후 중국을 침략하기위한 병참기지로 만들기 시작했고 만주지역의 중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일본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중국민을 상대로 포악한 학살, 강간, 약탈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에 따라 조사단을 파견하고 그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불법적인 침략행위로 결의를 내리고 즉각적인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일본은 국제연맹의 권고안을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정당내각에 종지부를 찍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계속 중국침략을 위한 준비를 진행시켜나갔다.
그런데 일본은 이 침략행위를 '전쟁'이 아닌 '사변'이라고 정의했다. 일본은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권이 없는 임자없는 땅에 정당하게 진출한 것이라는 명분을 가지기 위한 일본 측의 의도였다.
2. 본격적인 대륙으로의 진격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수년간에 걸친 준비 끝에 드디어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개시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침공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트집을 잡아 선제 공격을 감행했고, 중국병사들이 이에 대항함으로써 중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치열한 교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즉시 중국군이 먼저 일본사병들을 공격하여 사살했다고 억지를 부렸고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서 중국을 침략하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다. 결국 이러한 일본의 억지 군사행동으로 말미암아 대규모 침략전쟁으로 확대된 이 사건은, 분명히 침략전쟁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일본은 ‘루거우차오사건’ 또는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주장하면서 또다시 선전포고 없는 침략행위를 계속했다. 이것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멸시감을 일본 국내에 조장시키면서, 중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치 ‘아시아 혁신’을 위한 위대한 사업인양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고 거짓을 꾸민 일본정부의 침략정책의 발로였다. 관동군은 또다시 침략의 선봉에 서서 중국을 무차별로 침략해 들어갔다. 손쉽게 북경과 천진을 점령한 일본군은 곧 중국에서 가장 경제가 번성한 상하이를 공격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절대적인 위기에 직면한 중국도 한심한 상태였다. 정부는 국민당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군대는 근대화 무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군부는 부패해 있었고, 장군들은 부하들의 군량을 빼돌리거나 군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된 훈련이나 무기를 받지 못해서 의욕이 없는 병사들은 장교들을 신뢰하지 못했고, 전투가 벌어지면 탈주병들이 속출했다. 결국 이러한 내우외환에 직면한 중국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서 제대로 저항을 못했다. 무조건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일관성없는 무모한 방어명령과 턱없이 모자라는 군장비로 인해서 중국군 수십만명이 몇 달만에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일본병사 1명에 대해서 중국군은 1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면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장개석 정부는 계속 후퇴를 거듭해서 정부는 보존할 수 있었지만, 정부를 믿었던 수많은 국민은 잔혹한 일본군앞에 벌거벗은채로 노출되었다. 일본군은 점령하는 곳마다 학살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중국인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다.
3. 남경 대학살
결국 일본은 상하이를 점령했으며, 드디어 1937년 12월에는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했다. 남경에서는 일본군의 잔학행위가 극에달해서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남경시민 수십만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학살방법은 잔인함 그 자체였다. 진격로에 장애가 되는 마을은 항공기를 동원해서 초토화 시켰고, 주민들을 모아놓고 휘발류를 뿌린후 불을 질러 죽이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자들은 강간당한뒤에 죽창에 찔려죽었고, 울고 있는 아이를 일본도로 베어 죽였으며, 중국군에 지원할 우려가 있는 20-30대의 중국청년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장총으로 머리를 사격해서 죽였다. 물론 수만명의 중국군 포로들도 남경외곽에서 구덩이를 파고 몰아넣은후 수류탄과 기관총 세례를 가해 몰살시켰다. 남경은 통곡의 도시가 되었으며 온도시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전후 조사에 의하면 남경대학살의 희생자는 30만명에 이른다고 하며,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 밖에 양쯔강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버려졌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중국민에게 공포를 심어 전의를 잃게 만들려했던 일본의 잔혹행위는 오히려 중국민들에게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결국 벼랑끝에 몰린 중국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항전하였다. 결국 일본은 중국군의 유격전에 빠져들었고 이미 광범위한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일본의 점령지역은 ‘점(도시)과 선(도로)’을 유지하는 데에도 벅찬 형편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일본군은 삼광작전(三光作戰:殺光 ·燒光 ·光) 등 각종 잔학행위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쟁 전기간에 걸쳐 중국인 1200만 명을 죽였으며, 결국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은 중국 민족 그 자체를 적으로 한 전쟁이라는 느낌을 중국민에게 주었고 중국내의 항일 분위기가 점차로 고조되었다. 결국 일본은 수백만의 대군과 온갖 근대병기를 동원했지만 중국 민중의 항전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며 중일 전쟁은 일본의 계획과는 달리 장기화 되었고 태평양 전쟁을 발발시킨후에는 중국전선이 제 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 버리게 된다.
4. 태평양 항공전의 시발점
한편, 제대로 편제를 갖추지 못한 중국군은 제대로된 항공전력이 없었다. 따라서 일본은 무저항의 중국하늘을 완전히 농락했으며 무차별 폭격을 퍼부으면서 육군의 진격로를 텄다. 그러나 중국에 점차로 원조의 손길이 뻗치면서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에서 구식으로 치부되던 항공기들이 중국의 요청으로 긴급히 원조되었다. 그리하여 일본군과 중국군간에 항공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아시아 하늘을 피로 물들인 태평양 항공전의 시발점이었다.
일본은 1차대전이후에 유럽의 정세를 살펴본후 항공전력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유럽에 많은 기술자를 파견하여 항공기술을 배워오도록 했다. 그리고 착실히 서구의 기술을 모방했고, 비행기 엔진의 국산화를 독려해왔었다. 이러한 결과 중일전쟁이 벌어질 시점에는 일본은 육군과 해군이 자국산 전투기와 폭격기들로만 장비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실 이무렵만해도 유럽이나 미국은 일본의 항공전력에 대해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1930년대는 유럽에서 독일이 점차로 위협적인 세력으로 커나가고 있었고 세계의 이목이 독일, 프랑스, 영국이 주도하는 유럽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조차도 일본보다는 유럽전장을 미래의 전장으로 주목하고 대서양을 건널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를 개발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시아의 이 작은 섬나라는 인종적으로도 열등하고, 농업국가이기 때문에 항공기를 제작할 기술력이 매우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나름대로 기술을 모방하고 발전시켜 중일전쟁에서는 이미 상당한 항공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육군의 Ki-27 전투기와 일본 해군의 A5M 전투기는 1930년대를 기준으로 볼 때는 유럽의 전투기들에 비해서 별로 주눅들지 않을 만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엄호하에 육군항공대의 Ki-21 폭격기와 해군의 G3M 폭격기들이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의 실정은 실로 엉망이었다.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서 서구의 중고 전투기를 원조형식으로 제공 받을 수 있었지만 이들을 야전에서 운용할 만한 정비기술력이나 조종사들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부패한 군부에서는 귀족 자제를 전투기 조종사를 시켜준다면서 장교로 입대할 수 있도록 하면서 많은 뇌물을 받기도 했고,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금한후 사적으로 유용했다. 예를 들어 어떤 도시에서 모금한후 원조받은 전투기 1대를 끌고와서는 전투기에 '어느어느 도시의 시민들이 기증한 것'이라는 표기를 하고 기념 비행을 실시한후 곧 다른 도시로 가서는 이전의 도색을 지우고 같은 방법으로 또다시 모금을 하는 방법으로 전투기 1대가 10여군데의 도시에서 모금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군자금은 병사들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군부의 부패한 장군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쓰여졌다.
중국의 시가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자행한 주역, Ki 21 폭격기이다. 일본 폭격기들은 전투기의 요격을 받는 경우 매우 취약했지만 개전초기의 중국 하늘에는 사실상 일본 전투기들에 대항할 만한 중국공군의 세력이 거의 없어 자기 안방처럼 하늘을 누볐다.
결국 이러한 부패하고 무능한 중국군은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일본의 항공전력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음이 당연했다. 하나로 똘똘 뭉쳐도 힘들판에 안에서 썩어가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이란 말인가. 당시 중국에 파견되었던 서구의 군사고문관들은 이런 세태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으며, 기초 비행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종사들이 전투기를 타고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날아오르는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당시 중국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자신의 비행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적과 싸우기도 전에 비행사고로 스스로 죽어가는 조종사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지상전에서도 일본 관동군의 공격앞에 중국군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머리위에서는 일본의 항공기들이 자기 안방처럼 돌아다니면서 폭탄을 퍼붓거나 기총사격을 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점차로 중국을 광범하게 침공해 들어가면서 계속 후퇴를 거듭하는 중국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항공기들이 활동해야 하는 범위가 넓어졌고, 야전 비행장도 부족해지고 있었다. 결국 일본 폭격기들은 아군 전투기의 엄호없이 원거리의 적을 폭격하는 임무를 많이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이경우 몇대안되는 중국의 전투기들을 만나게 되면 어느정도 손실을 감수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일본의 폭격기들은 전투기의 공격에는 매우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군은 보다 원거리를 비행할 수 있는 장거리 호위 전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했고, 이것이 일본 최고의 전투기 A6M 제로 전투기를 탄생시키게 된 시대적인 요구였던 것이다.
여하간 중국의 하늘은 불타오르게 되었고, 일본은 실전에서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항공전력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항공전력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결국 중일 전쟁을 통해서 일본의 항공전력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었고 많은 조종사들이 실전 경험을 통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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