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는 돌아가야 할때
한편, 총 1시간 45분여에 걸친 공습이 모두 끝나자 일본기들이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전
황을 지켜보던 후지다는 불타는 진주만상공을 한 바퀴 선회하면서 피해상황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진주만을 뒤덮은 검은 연기구름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후지다는 그들의 기습공격이 분명히 성공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항공모함이 기다리는 수역을 향해서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귀환하는 도중 후지다는 한번 더 공습을 가하여 확실하게 진주만의 전투능력을 상실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나구모의 기동부대는 돌아오는 함재기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격을 끝내고 돌아온 함재기 조종사들은 반자이를 외치며 열광하는 승조원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조종석에서 내리고 서로 악수를 하면서 기뻐했다. 이 무렵 기상이 나빠져서 함재기들은 15도 가까이 롤링을 하는 상태에서 착함해야 했으나 함대 상공에 도달한 함재기들은 50여대가 착륙과정에서 가벼운 파손을 입는 정도에 그쳤을뿐 모두 무사히 착륙했다. 돌아오지 못한 함재기는 제로 전투기 9기, 뇌격기 5기, 급강하 폭격기 15기로서 총 29기에 불과했으며 탑승하고 있었던 조종사 55명 전원이 전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총 출격기 353기의 10%에도 못미치는 가벼운 손실이었다.
후지다의 기체를 포함해서 함대상공에 다다른 함재기들이 모두 무사히 귀함하자, 기함 아까기의 사령탑에서는 나구모 제독과 참모들이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다시 한번 출격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들뜬 상태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순간 잠시 불확실한 한때가 흘러갔다. 참모들사이에 더 공격을 해야한다는 쪽과 이제는 귀환해야 한다는 쪽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항공대장 후지다는 3차 공격을 해야한다고 믿고 있었으며 당연히 그런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제 2 항공전대 (항모 히류, 소류)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공격적인 성향의 야마구찌 다몽 소장은 당연히 3차 공격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승무원들에게 공격준비 명령을 내린 후 자신의 의견을 나구모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나구모는 매우 신중했다. 그는 우선 하와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미 항모들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제일 먼저 걱정했다. 3차 공격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던 부관들에게 나구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명히 아직까지는 우리 일본해군에게 운이 따르고 있으며 우리의 공격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우리 정보부나 정찰기는 단 한척의 미 항모의 위치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진주만 근해에 미 항모나 잠수함이 있다면 더 이상 우리가 현위치에 머무르다가는 반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이제는 미군이 공습에 대비하고 있을 것이므로 더 이상 우리에게 기습의 이점은 없다. 미군의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함재기들의 피해가 커질지도 모른다. 조종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진주만에는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더 이상 공격을 했을 때 손실에 비해서 얻는 것이 적을 것이다. 나에게는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상으로 우리 함대의 안전도 중요하다. 자! 이제는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 때이다.'
사실 나구모는 애초부터 2차 공습까지만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야마모토의 참모장이던 구사까 소장도 이에 동의했다. 나구모에게는 미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이상으로 기동함대의 안전도 중요했다. 결국 신중한 나구모는 더 이상 공습은 중단한다는 명령을 내렸고, 후지다를 포함한 많은 조종사들의 탄식을 뒤로한채 기함 아까기의 마스트에는 철수를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한편, 본토의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이런 나구모의 결정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사령부의 참모들은 태평양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격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마모토 제독은 상황판단은 실제 참전하고 있는 야전 사령관인 나구모 제독이 가장 잘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나구모에게 진주만 공습의 전권을 일임한 상태였으므로 나구모의 판단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결국 최초의 함재기가 발함한지 7시간이 경과한 하와이 시간으로 오후 1시 30분, 미태평양 함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일본의 기동함대는 성공의 기쁨과 아쉬움을 태평양에 남긴채 일제히 일본 열도를 향해서 귀로에 올랐다.
2. 폭풍은 지나가고
약 2시간여에 걸친 일본군의 공습이 끝난 후 진주만은 그야말로 처참한 지옥과도 같았다. 일요일의 화창한 아침에 벌어진 참극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신음하고 있는 부상자들을 구조하고,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과 싸워야 했다. 이런 상황을 상상도 해본적이 없었던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지를 모르는 공황 상태였다.
게다가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해 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이런 불안감은 온갖 루머와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다. 일본 낙하산 부대가 곧 공수작전을 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상당수의 일본 상륙정이 근해에서 발견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도 입을 타고 퍼졌다.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밝혀지기까지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본해군이 선보인 각종 신무기에 대해서도 놀라움 그 자체였다. 특히 얕은 수심에서 사용된 어뢰는 진주만이 어뢰공격에서 안전지역이라고 믿었던 미군의 의표를 완벽하게 찔렀다. 사용된 어뢰 40발 중 36발이 정확하게 명중했으며 파괴력도 대단했다. 게다가 미군이 생각하던 바와 달리 일본해군의 항공기들은 모두 미군의 항공기들보다 오히려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뢰와 폭탄이 모두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투하되었으며, 특히 제로 전투기는 어떻게 그토록 먼거리에서 날아와 오랜 시간동안 진주만 상공을 완전히 장악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었는가 의문 투성이었다. 일본의 항공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지 않았는가...
여하간 장군들부터 수병들까지 모두가 통감하고 있던 것은 그들의 방어태세가 온통 허점투성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이 공습이 꿈이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미군 최고의 요새가 이토록 허무하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것은 두눈으로 실상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생생하게 보고 있었던 공습 후의 참상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진주만의 포드섬에 정박하고 있던 전함들은 모두 치명타를 입었다. 아리조나, 오클라호마, 캘리포니아, 웨스트버지니아가 침몰했으며 네바다, 펜실바니아, 메릴랜드, 테네시는 침몰은 면했지만 대파되었다. 그외에 기뢰부설함 오글라라와 표적함 유타가 침몰했으며 순양함 헬레나, 호놀루루, 래리가 대파되었다. 구축함 캐신, 다운즈가 침몰했으며 쇼는 대파되었다. 이외에 수상기모함 커티스와 수리공작함 베스탈도 화를 면하지 못했다. 미 태평양 함대는 반신불수가 되 버린 것이다. 해군과 육군 항공대 기지도 큰 피해를 입어 육군항공대는 완파 96기, 대파 128기의 손실을 입었으며 해군은 완파 92기 대파 31기의 손실을 기록했다. 이로서 하와이의 항공전력은 사실상 와해된 상태가 되었다. 인명 손실도 경악할 수준이었다. 해군 병사 2008명이 전사했으며 육군은 228명이, 해병대가 109명이 전사했다. 민간인도 68명이 공습 와중에서 사망했다. 여기에 부상자수가 1000여명을 넘어서서 하와이는 전체가 거대한 시체안치소와 병원으로 변해 버렸다.
이처럼 진주만 공습은 미국인들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지만 일본군에게는 전술적으로 굉장한 성공이었다. 역사상 해군이 투입된 전투에서 적에게 이토록 궤멸적인 타격을 단 한번의 기습 공격으로 입힌 선례는 없었다. 많은 군사전문가들로부터 이 공격작전은 신무기와 항공모함 집단운용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완벽하게 구사한 공대지 전투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애초에 일본군이 의도했던 단기결전에서의 확실한 승리를 위한 방법으로서 진주만 기습은 실로 훌륭한 전략이며 또한 매우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3. 진주만을 기억하라!
공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폐허가된 진주만과 항공기지를 복구해야하는 엄청난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시작해야하는지조차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강인한 의지를 보였다. 모두들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양이 가능한 함선과 불가능한 함선을 분류해서 가능하면 수리를 해서 전선에 투입하는 방향으로 결정 했다. 전함중에서는 굉침한 아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제외한 모든 전함을 인양하여 수리하도록 했다. 진주만의 수심이 15m 정도로 얕았으므로 이 작업은 애초의 예상과달리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다. 하와이섬 전체는 등화관제가 실시되었지만 진주만의 수리시설에서는 등화관제의 예외지역으로 대낮같이 밝은 조명하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파손된 선박들의 복구와 수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진주만 공습에서 전략적인 큰 실수를 범했다. 그것은 진주만항내의 선박들에게만 공격이 집중되어 그이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류 저장탱크들과 수리시설들을 놓치고 말았던 점이다. 사실 이 유류탱크는 눈에 잘띄는 위치에 모여 있었으며 항공 공격에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여서 제로 전투기의 기관포 몇발만 맞아도 엄청난 연쇄 폭발을 일으켰을 것이었다. 여기에는 미 태평양 함대를 운영하기 위한 연료가 무려 1년치 이상 저장되어 있었는데 만일 이 유류 탱크들이 파괴되었다면 미군은 연료보급을 할 수 없어 모든 전투함을 센디에고로 철수시켜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그 가치는 높았다. 이 중요한 목표물이 왜 공격을 받지 않았는지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여하간 천만다행으로 이 유류 탱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미군은 진주만을 계속 해군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수리시설들도 공습을 모면하여 공습이 끝나자마자 곧 피해를 입은 함선들을 수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이 저지른 더 큰 실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민들은 자기들의 아들, 남편, 아버지 그리고 친구들이 전혀 싸울 의사가 없었던 일본군으로부터 아무런 경고도 없이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에 모두들 치를 떨면서 크게 분노했다. 사실 이 점은 야마모토도 우려했던 것으로 애초의 계획은 공격 개시 30분전에 일본대사가 미정부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대사는 암호해독 작업이 늦어져서 공습이 시작된후에나 미정부에 포고문을 가지고 출석할 수 있었다고 변명을 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주만 공습 사실을 알게된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날'이라고 했으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일본이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농락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인들은 2차대전이 시작된지 2년넘게 고집해온 고립주의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이글거리는 복수의 칼날을 갈게되었으며 전쟁에서 완전히 이길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는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미국인들에게는 피의 복수를 다짐하도록 만드는 '진주만을 기억하라 (Remember Pearl harbor)'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져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진주만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았다.
(이글은 순수 창작글이 아니며 출처를 알 수 없는 인터넷에 관련 문서들은 발췌,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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