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장씨의 본관 '덕수'는 황해도 개풍군 덕수현(개성 인근)에서 유래한다.
시조의 4세손으로 고려조에서 의랑 벼슬을 지낸 중시조 '장우'가 고려 왕조의 멸망을 비탄해 하며 평택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정착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평택시 팽성읍 석근 1리. 송화 1리, 대사 1리 일대가 덕수 장씨의 집성촌으로서 덕수 장씨의 '종가마을'이 되었다. 마을어귀 장준·장현근 부자의 효자 정문은 이곳이 덕수장씨의 본거지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선조말 순조가 내렸다는 정문의 현판에는 “병든 어머니를 위해 한겨울 웅덩이에서 기도한 뒤 얼음에서 나온 붕어와 잉어를 고아드려 소생케 했다” “독사에 물린 아버지의 상처에서 독을 빨아내고 독사의 쓸개를 환부에 발라 낫게 했다”는 등 효도에 얽힌 미담들이 빼곡하게 쓰여져 있다.
오랜 세월 적지 않은 외래인들이 이 나라에 귀화하여 한국인으로 살아간 일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덕수장씨는 귀화하여 성공한 가문 중에 하나이다. 현재 5만여명에 이르는 장가의 후손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시조 장순룡'은 고려 고종 때인 1254년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충렬왕비)를 수행해 들어온 수행관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름이 '삼가'였는데 그 부친은 원나라에서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낸 백창이라고 전한다. 장순룡은 충렬왕 대에 낭장, 장군, 대장군 등을 거쳐 문하찬성사를 지내는 등 고속 출세를 하며 덕성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때 황해도 개풍군 덕수현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충렬왕은 또 그에게 삼가라는 이름 대신 장이라는 성씨와 순룡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어 오늘날 덕수 장씨 가문을 열 수 있게 했다.
개성에는 '장가장'이라는 말이 전해내려 오는데 "장미로 장식된 장가의 화려한 집담장"을 일컫는 이 말은 바로 시조 장순룡의 저택 담장(현재 북한 개성역 맞은 편)에서 유래했다. 충렬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우울한 말년을 보냈던 곳도 바로 이 장가장이었다.
시조 이후에도 고려말, 조선조에 걸쳐 적잖은 고관대작이 이 집안에서 배출됐다. 시조의 4세손인 장우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둔하다 후에 정승이 된 황희의 간곡한 권유로 조정에 나와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덕수 장씨가 중시조로 꼽고 있는 인물이다. 덕수 장씨가 배출한 조선조 최대의 인물은 인조 때 명신이자 대문장가였던 계곡 '장유'로서 신흠, 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한문학의 4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인조반정 당시 이조정랑을 맡아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딸이 효종에게 출가해 인선왕후가 되면서 신풍부원군이 됐다.
이 외에 명종 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장언량, 중정반정의 일등공신으로 하원군에 봉해진 무신 장정 등이 유명하다.
현대에 와서도 장경우 한나라당 의원, 장경작 웨스틴조선호텔 사장, 장남수 현대칼라 회장, 수필가 장생주씨, 장덕상 조계종 종회의원 등 다양한 분야에 인물들이 있다.